
이준규 <풍덩파동동굴 / divewaveca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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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아는시간
콘노 유키
그때는 보이지 않았던 손가락이 필름 카메라로 찍은 사진에 발견된다. 찍었던 당시엔 몰랐지만, 필름을 현상한 후에 알게 된 사실이다. 보이는 것을 기록하여 보여주는 매체(카메라)에 시차가 생긴 결과이다. 카메라 렌즈를 가려버린 손가락이 상을 뭉개버렸다—조각상을. <아는 사진 #1-3>(2024) 중 한 점은 사물의 생김새를 보고 비소성점토로 재현하고 색을 입혀가는 이준규의 작업 방식이 내면화된 작업이다. 그는 손가락으로 피사체를 가린 필름 사진을 비소성점토로 재현했다. 작가는 왜 이 조각상 앞에서 사진을 찍었을까. 왜 하필 잘못 나온 사진을 재현했을까. 손가락이 같이 찍힌, 의도되지 않은 그의 경험은 부피를 지닌 물성을 손으로 만지며 기억하고 싶어 하는 미술가의 마음을 반영하는 듯하다. 버튼을 누르기만 하면 셔터가 내리는 기계가 함의하는 바는 이것이다—눌러야만 흔적을 남길 수 있다는 사실. 이준규가 그때 그곳에서 본 조각상은 흐릿하지만, 이는 그 정도로 그가 가까이 다가가고 싶어 한 사실로 와닿는다. 그때 그곳에서 봤다는 기억 또한 흐릿하지만, 이 경험을 더듬듯이 이준규는 점토를 만지고 작업한다.
전시장에는 이준규가 주변 사물을 관찰하고 같은 크기로 만든 작품들이 있다. 그중에는 <아는 사진 #1-3>의 사진을 찍은 필름 카메라도 있다(<아는 사물 #1-30>, 2024 중 한 점). 이번 개인전에서 이준규가 선보이는 작업은 실물과 거의 일대일 크기로 제작되었다. 이 말은 곧 그의 몸이, 그리고 손이 감각한 크기에 의해 재현되었다는 이야기이다. 점토의 물성을 중력에 내맡겨 형태가 휘거나 말린 작업도 있지만, 크기는 대체로 실물과 같다. 렌즈를 잘못 건드리고 카메라를 든 손으로 그는 사물을 만지고, 점토를 만지며, 작품을 만들었다. 그렇다면 이는 오로지 수치적인 감각의 재현에 그칠까? 이준규는 사물을 등신대로 재현했을 뿐만 아니라 무어라 할 수 없는 감각이나 무게감에 손을 뻗었다. 그러니까 막막한 상실, 막막한 대상을 몸소 가늠하기 위한 첫걸음이었다. 등신대적인 감각은 살던 도시를 떠나기 전, 지도상에 작품 모양을 겹쳐보고 그 영역을 산책한 <손자국 발자국 눈자국>(2025)에서 그랬듯이, 이준규에게 상실이 떠안겨 주는 막막함을 기억하고 추모하는 데서 출발한다. 조각상의 크기와 무게를 어떻게 눈에 담을 수 있을까. 카메라는 이 감각을 어떻게 이 작은 필름에 새겨넣을 수 있을까. 우리가 인간이라면, 그 감각을 어떻게 기억할 수 있을까—누르고, 매만지고, 더듬는 행위를 통해서.
집이나 사물이 가진 물리적인 부피나 크기, 무게감은 이제는 없는 막막함을 헤아리고 다스리는 심리적 위로가 되어 준다. 독일에 살던 시절, 이준규는 <아는 장소>(2024)를 만들었다. 이번 개인전 포스터에도 들어간 이 작업에서, 작가는 식물을 형상화한 일부분을 가지고 왔다. 잎과 화분을 분리해서 재구성한 작품에는 손본 흔적이 남아 있다. 누군가가 이야기해 주지 않으면, 색이 바래진 것으로 보일지도 모른다. 하필 왜 이준규는 화분과 식물을 분리까지 해서 같이 들고 왔을까. 독일에서 식물을 키우지 않았던 경험이, 이를 가능케 하지 않았을까. 거처를 옮길 때(특히 나라를 이동할 때), 식물은 뿌리를 뽑혀 다른 식물로 대체된다. 비록 작품이더라도, 화분만 들고 와도 충분했을 것이다. 이준규는 본인이 태어나고 자란 곳에 다시 돌아왔다. 그래도 독일에서 살았던 경험, 보낸 세월을 잊지 않길 기도하듯이 뿌리 뽑힌(=분리된) 식물을 화분과 같이 들고 왔다. 정작 키운 적도 없는 식물이었지만, 상상의 뿌리와 상실의 뿌리는 한줄기가 되어 여기—한국에, 전시장에 도착했다. 생각해 보니, 카메라의 내용물, 그러니까 필름에 기록된 이미지 또한 분리를 통해 모습을 나타낸다. 분해된 테블릿 PC를 다시 비소성점토로 만들 때(<정물>, 2025), 그 안에서 정작 움직이고 돌아가던 것은 무엇일까. 이준규의 작품은 비석의 시간, 보이지 않는 것과 있는 것을, 시차를 두고 연결하는 곳이 된다.
보이지 않는 곳에 대한 신뢰와 염원의 뿌리가 부재 속에 표시된다—작가의 손을, 그 접촉을 통해서. 셔터를 누른 감각이, 조각상을 뭉개버림으로써 출현된 감각은 작품에서 사물과 피사체가 이준규의 곁을 떠난 이후로도 남는, 몸에 새겨진 습관이나 버릇을 되새긴다. 야외에 있던 그 조각상은 불변할까? 우리 앞에 노출되는 동시에 수많은 물리적인 변화에 노출되어 있다. 전시장에 놓인 <아는 장소>(2025)는 우리에게 비석이나 기념비처럼 다가온다. 비소성점토로 만든 작업이지만, 마치 묵묵한 돌처럼 보인다. 문을 열고 닫는 곳의 공백을 형상화한 이 작업은 묘비로도 보인다. 접촉한 손의 감각이, 지금은 사라진 물건과 장소, 그들과의 어울림을 여기에 담는다. 여기는 없지만, 있는 곳, 없어진 것이 여전히 몸담는 곳. 이준규는 본인의 작업 활동을 설명하면서 “과거의 것이나, 지나간 사람을 만난다”라고 했다. 그런데 과연, 그러기만 할까. 먼 훗날, 뒤늦게 이곳을 방문하는 사람을 기다리는 것처럼 보인다. 묘비가 누군가의 존재했음을 알려주고 상실을 애도하는 곳이 되듯이, 그의 작품은 많은 사람—본인을 포함한—을 맞이할 준비가 되어 있다.
추신: 서문을 준비하기에 앞서, 이준규의 작업실에서 대화를 나누었다. 그가 예전에 살던 집과 같은 자리이며, 당시 키우던 거북이가 잠든 곳이다. ‘귀묘龜墓’라고 이름지어진 이곳을 방문한 경험이, 서문(쓰기)의 시작과 마무리에 어떤 동력을 가져다준 것은 분명하다. 우리가 아는 시간은 과거뿐만 아니라 미래를 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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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준규
2026.04.08 – 04.26
13:00 – 19:00 (매주 월, 화 휴관)
서울 영등포구 양평로100 3F









